복도를 걷는 아이들


구스 반 산트 ‘엘리펀트(Elephant)’

영화는 복도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이 걷는다. 카메라가 뒤를 따라간다. 걷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다. 수업이 있고 점심이 있고 사진반이 있고 친구가 있다. 특별한 일이 없다. 그냥 그런 하루가 흐른다. 구스 반 산트는 그 하루를 오래 보여준다. 서두르지 않는다. 복도를 걷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면서 그게 얼마나 긴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보여준다. 보다 보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묵직해진다. 왜 묵직해지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된다.

이 영화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다 안다.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 근데 영화는 그것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하루를 보여주다가 어느 순간 그 일이 일어난다. 예고가 없다. 복도를 걷던 아이들이 갑자기 그 안에 있게 된다. 관객은 알고 있었는데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된다. 알면서도 놀란다. 그게 이 영화가 하는 일이다. 알고 있다는 것이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말 없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를 쓰면서 설명을 빼는 것에 대해 썼는데 구스 반 산트도 그렇다. 설명하지 않는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원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냥 일어난다. 그 전에 평범한 하루가 있었다는 것만 보여준다. 평범한 하루가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무겁다.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무겁다.

카메라가 같은 시간대를 여러 번 반복한다. 어떤 장면은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다시 나온다. 아까 지나쳤던 복도를 다른 아이가 걷는다. 아까 봤던 장면이 다른 각도에서 보인다. 처음에는 헷갈렸다. 나중에는 그게 이 영화의 방식이라는 걸 알았다. 같은 시간에 여러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 시간이 각자에게 다른 시간이었다는 것. 같은 복도를 걸으면서 각자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 그게 비극의 방식인 것 같다.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서로를 몰랐다는 것.

엘리라는 아이가 나온다. 사진을 찍는다. 구름을 찍고 운동장을 찍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찍는다. 찍고 나서 뷰파인더로 들여다본다. 렌즈 너머로 세계를 보는 아이. 그 장면이 짧은데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사진을 찍는다는 게 뭔가를 붙잡으려는 것인지 거리를 두려는 것인지. 둘 다인 것 같다. 보면서 동시에 물러서는 것. 그게 이 영화 전체의 방식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아이들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거리를 유지한다.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다. 화양연화의 왕가위가 문틈 너머로 찍는 것처럼 구스 반 산트도 어떤 거리를 지킨다. 그 거리가 이 영화를 견딜 수 있게 만든다.

영화에 음악이 거의 없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총기를 가진 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피아노를 치는 손과 나중에 총을 드는 손이 같은 손이라는 것. 베토벤을 치던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 근데 구스 반 산트는 그걸 대비로 쓰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피아노를 치는 아이. 그게 다다. 설명이 없다. 그래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된다. 음악을 친다는 것과 폭력이 같은 사람 안에 있다는 것.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영화는 묻지 않는다. 관객이 그 질문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영화 제목이 엘리펀트다. 코끼리. 방 안의 코끼리라는 말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 이 영화가 그 말을 제목으로 쓴 것 같다. 모두가 알고 있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 복도를 걷는 아이들의 하루 안에 그게 있었다. 아이들은 몰랐다. 관객은 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두 시간을 보낸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그 복도가 머릿속에 있었다. 아이들이 걷고 있었다. 카메라가 따라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