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빌 에반스 ‘Waltz for Debby’

재즈를 잘 모른다. 좋아하는 재즈 뮤지션이 있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잘 못했다. 재즈라고 하면 뭔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는 것 같았다. 코드 진행이라든가 즉흥 연주라든가. 그런 걸 모르면 제대로 못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잘 안 들었다. 아는 척하기 싫어서 모른 척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카페에서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좋다고 생각했다. 찾아봤더니 빌 에반스였다. ‘Waltz for Debby’였다. 그때부터 들었다. 재즈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그 다음 문제였다.

‘Waltz for Debby’는 1961년에 녹음됐다. 빌 에반스 트리오가 뉴욕의 작은 클럽 빌리지 뱅가드에서 공연한 실황이다. 피아노와 베이스와 드럼. 세 명이다. 관객 소리가 들린다. 잔 부딪히는 소리도 들린다. 처음에는 그게 거슬렸다. 나중에는 그게 좋아졌다. 음악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음악이 연주되던 공간이 같이 있다는 것. 1961년 뉴욕의 어느 밤이 같이 녹음되어 있다는 것. 그 밤에 거기 있던 사람들의 소리가 같이 있다는 것.

빌 에반스의 피아노는 조용하다. 세게 치지 않는다. 누르는 것처럼 친다. 건반을 누르고 나서 그 음이 어디로 가는지 들으면서 다음 음을 누르는 것 같다. 서두르지 않는다. 음과 음 사이에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이 침묵이 아니라 음악의 일부인 것 같다. 빌 에반스가 말하지 않는 것들이 말하는 것들만큼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재즈를 모르는 사람도 그걸 느끼는 것 같다. 나도 느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느꼈다.

타이틀곡 ‘Waltz for Debby’는 에반스가 조카 데비를 위해 만든 곡이라고 한다. 어린아이를 위해 만든 왈츠. 찾아보기 전에는 몰랐다. 알고 나서 다시 들었다. 달라지지 않았다. 아는 것이 음악을 바꾸지는 않는다. 근데 아는 것이 듣는 방식을 바꾸기는 한다. 어린아이를 위해 만든 음악이라고 생각하면서 들으면 좀 다르게 들린다. 더 부드럽게. 더 조심스럽게. 뭔가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게 실제로 에반스가 의도한 건지는 모른다. 내가 그렇게 듣게 된 것뿐이다.

‘사진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찍는다고 갖게 되는 건지 갖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음악을 듣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듣는다고 갖게 되는 건지. 1961년의 그 밤을 듣는다고 내가 그 밤을 갖게 되는 건지. 아닌 것 같다. 근데 뭔가는 생긴다. 그 밤과 연결되는 뭔가. 가는 것과 연결되는 것은 다르다. 가면 거기 있게 되고 연결되면 여기 있으면서 거기가 생긴다. 빌 에반스를 들으면 여기 있으면서 1961년 뉴욕 어딘가가 생긴다. 그게 음악이 하는 일인 것 같다.

앨범에 ‘My Foolish Heart’라는 곡이 있다. 빌 에반스가 혼자 피아노를 친다. 베이스도 드럼도 없다. 혼자서 천천히 친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뭔가 잘못됐나 싶었다. 너무 조용해서. 다시 들었다. 그게 맞는 거였다. 이 곡은 원래 그렇게 들려야 하는 것 같았다. 혼자서 천천히 치는 것. 서두르지 않는 것. 어딘가에 도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치는 것. 유키 구라모토가 멈추는 게 어색한 음악이라면 빌 에반스는 멈춰도 되는 음악이다. 멈추면 거기서 또 시작된다. 시작점이 여러 개인 음악.

이 앨범을 녹음하고 몇 달 뒤에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스물다섯이었다. 에반스는 그 뒤로 한동안 음악을 거의 안 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이 앨범을 다시 들었다. 라파로의 베이스를 더 집중해서 들었다. 베이스가 피아노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피아노랑 대화하는 것 같다. 피아노가 말하면 베이스가 받고 베이스가 말하면 피아노가 받는다. 그 대화가 녹음으로 남아 있다. 스콧 라파로는 없는데 그 목소리는 남아 있다. 음악이 그런 것이기도 하다. 없어진 사람의 소리가 남는 것. 없어진 시간의 소리가 남는 것.

재즈 클럽에 가본 적이 있다. 홍대 근처였다. 좁고 어두웠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피아노와 베이스와 드럼이 있었다. 세 명이 연주했다. 잘 모르는 곡들이었다. 그냥 들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옆 테이블 사람들이 작게 이야기했다. 잔 소리가 났다. 1961년 빌리지 뱅가드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할 리 없는데. 그래도 비슷한 것 같았다. 피아노 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있고 밤이고. 그 정도면 비슷한 건지도 모른다.

빌 에반스는 나중에 다른 트리오를 만들어서 계속 음악을 했다. 좋은 음악을 많이 했다. 근데 많은 사람들이 이 앨범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왜 그런지 생각해봤다. 모르겠다. 스콧 라파로가 거기 있어서인지. 1961년의 그 밤이 거기 있어서인지. 잔 부딪히는 소리가 거기 있어서인지. 다 있는 것들. 다시는 없을 것들. 그 밤은 한 번뿐이었다. 그 세 명이 같이 연주하는 밤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근데 그 밤이 녹음되어 있다. 지금도 들을 수 있다. 그게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없어진 것들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