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는 평생 자화상을 그렸다. 55점의 작품 중 35점이 자화상이다. 왜 그렇게 많이 그렸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는 나 자신이었다고.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다시 생각했다.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안다는 것과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알면서도 자기를 보지 않으려 한다. 칼로는 보았다.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칼로가 거울을 처음 오래 들여다보게 된 건 사고 때문이었다. 열여덟 살에 버스 사고를 당했다. 척추와 골반과 다리가 부러졌다.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어머니가 천장에 거울을 달아줬다. 칼로는 거기서 자기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이상하다. 움직일 수 없어서 시작된 그림들. 몸이 고정되어 있어서 시선이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된 것. 고통이 작업을 만들었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칼로의 경우는 그것보다 더 구체적이다. 고통이 방향을 만들었다. 바깥을 볼 수 없어서 안을 본 것. 그 방향이 평생 갔다.
자화상에서 칼로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무표정에 가깝다. 눈썹이 일자로 이어져 있고 입술이 다물려 있고 시선이 정면을 향한다. 그 표정이 처음에는 굳어 보였다. 보다 보니까 굳은 게 아니었다. 응시다. 자기를 보는 시선. 판단하지 않는 시선. 있는 그대로 보는 시선. 칼로의 자화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그 시선이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 미화하지 않고 축소하지 않고 그냥 있는 것을 보는 것.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자화상들을 오래 보다 보면 알게 된다.

‘부러진 척추’라는 작품이 있다. 칼로가 코르셋을 입고 서 있다. 몸이 갈라져 있고 그 안에 부러진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다. 못이 온몸에 박혀 있다. 눈물이 흐른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직접적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을 숨기지 않는다. 은유로 가리지 않는다. 부러진 것은 부러진 것이고 박힌 것은 박힌 것이다. 근데 그게 직접적인 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이건 실제 몸이 아니라 몸의 내면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 것. 고통은 원래 보이지 않는다. 칼로는 그것을 보이게 했다. 보이게 하는 것과 드러내는 것은 다르다. 드러내는 것은 감추어진 것을 꺼내는 것이고 보이게 하는 것은 원래 없던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칼로는 후자를 했다.
‘손을 닦아주는 일’을 쓰면서 조르주가 안느의 손을 닦아주는 장면에 대해 썼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순간에 대해. 칼로의 자화상도 그런 것 같다. 사랑이나 고통 같은 것들은 원래 형태가 없다. 칼로는 그것들에 형태를 준다. 부러진 기둥의 형태로. 온몸에 박힌 못의 형태로. 형태가 생기면 볼 수 있다. 볼 수 있으면 알 수 있다. 알 수 있으면 덜 혼자가 된다. 칼로의 그림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다. 형태를 갖게 된 것들이 보는 사람한테서도 형태를 찾는다.

‘두 명의 프리다’라는 작품이 있다. 두 명의 칼로가 나란히 앉아 있다. 한 명은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고 있고 한 명은 유럽풍 흰 드레스를 입고 있다. 두 심장이 보인다. 혈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럽풍 드레스를 입은 칼로의 혈관은 끊겨 있고 피가 흐른다. 이 작품은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한 해에 그렸다고 한다. 두 명의 자기. 사랑받던 자기와 버려진 자기. 멕시코 정체성과 유럽 정체성. 이어진 것과 끊긴 것. 칼로는 이 작품에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두 명을 나란히 앉혀두고 혈관을 보여준다. 관객이 거기서 뭔가를 읽어야 한다. 읽는 방식은 각자 다를 것이다. 칼로는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자화상은 자기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자기 안의 무언가를 보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칼로의 작품에는 자연이 자주 나온다. 꽃과 원숭이와 사슴과 뿌리. 몸과 자연이 섞이는 경우도 있다. ‘뿌리’라는 작품에서는 칼로의 몸에서 식물이 자란다. 가슴이 열려 있고 거기서 덩굴이 뻗어 나간다. 땅과 연결된다. 이 이미지가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몸이 땅과 이어진다는 것. 뿌리가 있다는 것. 칼로는 평생 몸의 고통 안에 있었는데 그 몸을 땅에 연결시켰다. 고통받는 몸이 동시에 자라는 몸이라는 것. 끊기는 것과 이어지는 것이 같은 몸 안에 있다는 것. ‘복숭아, 또는 여름이 끝나는 방식’에서 끝난 것들이 매번 별로인데 또 손이 간다고 했는데 칼로의 그림도 그런 것 같다. 고통이 끝나지 않는데 계속 그린다. 계속 그리는 것 자체가 이어지는 것이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은 수박을 그린 것이다. ‘삶이여 만세’라는 제목이다. 수박이 잘려 있고 그 안의 붉은 과육이 보인다. 화면 가득 수박이다. 1954년 7월에 그렸고 그녀는 그해 7월에 죽었다. 마지막 작품이 수박이라는 것. 삶이여 만세라는 제목이라는 것.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했다. 고통 속에서 평생 자기 자신을 그린 사람이 마지막에 수박을 그렸다. 자기 얼굴이 아니라. 잘린 수박과 붉은 과육. 이미 잘렸는데 아직 싱싱한 것. 끝났는데 아직 살아있는 것. 그게 칼로가 마지막으로 보이게 만든 것이다. 삶이 그런 것이라는 것. 잘려도 붉은 것.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
자화상을 그린다는 게 무엇인지 이 작품들을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자기를 본다는 것. 오래 본다는 것. 보면서 형태를 만드는 것. 형태가 생기면 혼자가 아니게 된다는 것. 칼로가 55점의 작품 중 35점을 자화상으로 남긴 것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것들에 형태를 주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형태가 있어야 다른 사람도 볼 수 있으니까. 볼 수 있어야 알 수 있으니까. 그 믿음이 그림 안에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면 세계가 조금 덜 혼자가 된다는 믿음. 칼로의 거울은 천장에 달려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이 천장의 거울을 보면서 자기를 그렸다. 그 방향이 평생 갔다. 잘린 수박의 붉은 과육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