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시간에 듣는 것


유키 구라모토 ‘Romance’

피아노 소리가 나는 카페가 있었다. 자주 가던 곳은 아니었는데 한번은 혼자 들어가서 한 시간쯤 있었다. 뭘 했는지는 기억 안 난다. 책을 읽었나. 그냥 앉아 있었나.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보고 있었나. 기억나는 건 피아노 소리뿐이다. 딱히 집중해서 들은 것도 아닌데 나올 때까지 계속 거기 있었다. 나올 때 카운터에서 뭐가 나오냐고 물어봤더니 유키 구라모토라고 했다. 받아 적었다. 그때 받아 적은 메모가 아직 어딘가에 있다.

유키 구라모토를 듣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다. 정확히는 그 카페에서 나온 날 저녁부터다. 집에 와서 검색해서 틀었다. <Romance> 앨범이 먼저 나왔다. 그냥 틀어뒀다. 밥을 먹으면서 들었고 설거지를 하면서 들었고 씻고 나서도 들었다.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냥 흘러가게 뒀다. 그런 음악이 있다. 멈추는 게 어색한 음악. 끊으면 뭔가 잘못되는 것 같은 음악. 유키 구라모토가 그랬다.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좋아하는 음악을 물어보면 항상 다른 걸 말했다. 그런데 유키 구라모토를 들으면서 아 이런 거 좋아했구나 싶었다. 좋아하는데 몰랐던 것들이 있다.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는데 이름을 몰랐던 것들. 이름을 알고 나서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다. 유키 구라모토가 그랬다. 이름을 알고 나서 뭔가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랬다.

<Romance>에서 제일 먼저 귀에 걸린 곡은 타이틀 트랙이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찾아보니 실제로 많은 곳에서 쓰인 곡이었다. 드라마 ost로도 쓰이고 광고에도 쓰이고. 그래서 낯익은 거였구나 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낯익은 느낌이랑 처음 듣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곡이 있다. 이상한 조합인데 실제로 그렇다. 들어본 것 같은데 이렇게 들은 건 처음인 것 같은. 그게 좋은 곡인지 나쁜 곡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곡이 있다는 걸 안다.

《패터슨》의 패터슨이 버스를 몰면서 머릿속으로 시를 쓰는 것처럼 이 앨범을 들으면서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 무슨 생각인지는 나중에 기억 안 난다. 음악이 끝나고 나면 생각도 같이 끝나는 것 같다. 남는 게 없는데 뭔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만 남는다. 그게 싫지 않다. 어떤 시간은 남지 않아도 괜찮다. 있었으면 된다. 패터슨이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서 시를 쓰고 공책에 받아 적는 것처럼 나는 이 음악을 틀고 멍하니 있다가 끄고 잠든다. 남는 건 없는데 다음 날 또 튼다.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는 화려하지 않다. 기교를 보여주려는 것 같지 않다. 그냥 어떤 감정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 같다. 너무 슬프지도 너무 밝지도 않은 온도.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온도. 그게 좋았다. 음악이 너무 강하면 피곤할 때가 있다. 감정을 강요받는 것 같은 느낌. 유키 구라모토는 그러지 않는다. 틀어놓고 다른 걸 해도 된다. 음악이 방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없으면 뭔가 빠진 것 같다.

밤에 혼자 있을 때 자주 틀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나고 있으면 덜 조용한 것 같다. 조용한 게 싫은 건 아닌데 아무 소리도 없으면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뭔가 빠진 것 같은. 유키 구라모토를 틀면 그 빠진 자리가 채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빠진 자리가 있다는 걸 잊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는데 결과는 비슷하다. 《아무르》의 조르주가 안느가 없어진 아파트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것처럼 어떤 빈자리는 채워지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음악도 그런 것 같다. 빈자리를 없애주는 게 아니라 같이 있어주는 것.

앨범을 처음 들은 지 꽤 됐다. 그 사이에 다른 음악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유키 구라모토는 계속 돌아오게 된다. 특별히 생각나서가 아니다. 어느 날 밤에 뭘 틀까 하다가 그냥 틀게 된다. 그리고 틀고 나서 아 맞다 이거 좋지 싶다. 매번 그렇다. 잊고 있다가 다시 만나는 것들이 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잊은 게 아닌 것들.

그 카페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한동안 안 갔더니 나중에 지나가다 보니 없어져 있었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냥 어느 날 없었다. 메모는 아직 어딘가에 있을 텐데 찾으면 뭐 할 것도 아니라서 찾지 않고 있다. 유키 구라모토는 아직 듣는다. 주로 밤에. 주로 혼자. 카페가 없어져도 음악은 남아 있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