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덮지 못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책을 읽다가 멈추는 순간이 있다. 문장이 좋아서가 아니라 더 읽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멈추는 순간.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기가 싫었다. 넘기면 뭔가 끝나버릴 것 같아서. 그런 기분이 드는 책이 자주 있지는 않다. 처음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 안 난다. 오래됐다. 그 뒤로 몇 번 더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다른 문장이 걸렸다. 처음 읽었을 때는 나오코 때문에 읽었다. 두 번째는 미도리 때문에 읽었다. 세 번째는 와타나베가 전화박스에서 우는 장면 때문에 읽었다.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있는 전화박스. 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와타나베는 거기서 운다. 오래.

하루키의 문장은 깔끔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데 감정이 온다. 어떻게 그러는지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쓴다. 나오코가 와타나베한테 편지를 쓰는 장면들이 그랬다. 편지 내용이 슬픈 게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슬펐다. 거기 있으면서 편지를 쓰는 사람. 편지밖에 할 수 없는 사람. 미도리는 다르다. 나오코랑 완전히 다르다. 미도리는 직접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미도리가 좀 버겁게 느껴졌다. 나중에 다시 읽으니까 미도리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그게 미도리의 방식이었던 거다. 살아남는 방식. 어떤 사람은 말을 아끼면서 살아남고 어떤 사람은 다 말하면서 살아남는다. 둘 다 살아남으려는 거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와타나베가 있다. 와타나베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 나오코한테 가면 미도리가 생각나고 미도리한테 가면 나오코가 생각난다. 그게 비겁한 건지 어쩔 수 없는 건지 읽으면서 계속 판단이 안 됐다. 지금도 판단이 안 된다.

유키 구라모토를 들으면서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걸 쓴 적 있는데 이 책을 읽을 때도 비슷했다. 읽으면서 뭔가를 계속 생각했는데 책을 덮고 나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남는 게 없는데 뭔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이 오래 갔다. 지금도 가끔 그 느낌이 난다. 책을 읽은 지 오래됐는데도. 와타나베는 기타노가 죽고 나서 혼자 여행을 떠난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여행이다. 그냥 걷는다. 그냥 있는다. 어딘가에 도착하려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움직이는 것. 영화 ‘패터슨’에서 패터슨이 매일 같은 길을 걷는 것처럼 걷는다는 게 어딘가로 가는 게 아닐 때가 있다. 그냥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 와타나베의 여행이 그런 것 같았다. 목적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실은 가장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와타나베가 그랬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걷는데 사실은 뭔가를 엄청나게 원하는 사람. 그게 뭔지는 와타나베 본인도 몰랐을 것 같다.

레이코 씨가 마지막에 와타나베를 찾아오는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이 밤새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 나오코가 좋아했던 노래들을 부른다. 장례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장례식이 아니라 그냥 조용한 장례식. 울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장례식. 그 장면이 이 소설에서 제일 좋았다. 슬픔을 처리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그 장면에서 봤다.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른다. 어떤 사람은 편지를 쓰고 어떤 사람은 여행을 떠난다. 다 맞다. 다 틀리다. 그냥 그 사람의 방식인 거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와타나베는 미도리한테 전화를 한다. 미도리가 어디냐고 묻는다. 와타나베는 모르겠다고 한다. 어딘지 모르는 곳이라고. 그 대답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어딘지 모르는 곳. 지금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 그게 슬픈 건지 당연한 건지 잘 모르겠다. 스무 살 전후의 어느 시간에 우리는 다 그런 곳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는 채로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것.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다. 덮으면 끝나는 것 같아서. 그래도 결국 덮었다. 덮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러다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쳤다. 처음 두 줄만 읽었다. 그리고 다시 덮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