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맬릭 ‘트리 오브 라이프’ 리뷰
빛이 먼저 온다. 소리가 온다. 그다음에 사람이 온다. 테렌스 맬릭의 영화는 그렇게 시작하는데 사람이 주인공인 것 같은데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빛이 먼저고 소리가 먼저고 나무가 먼저고 바람이 먼저인데 사람은 그다음에 온다. 그게 이상하지 않다. 보다 보면 그게 맞는 것 같다. 사람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이지 세계가 사람 안에 있는 게 아니니까. 맬릭은 그걸 알고 카메라를 그렇게 든 것 같다. 빛부터. 사람은 나중에.
어릴 때 뒷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여름에 잔디가 자랐고 아버지가 깎았고 잔디 깎는 소리가 났고 풀 냄새가 났는데 그 냄새가 지금도 가끔 난다. 안 나는데 나는 것 같은 냄새.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보면서 그 냄새가 났다. 영화에 잔디가 나와서가 아니라. 그냥 났다. 왜 그 냄새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났다.

잭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는데 아버지는 엄하고 원하는 게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사람이고 그 원함이 아들한테 가는데 잘 돼라고 하는 건데 잘 돼라는 말이 무서운 말처럼 들리고 잭은 그 집에서 자란다. 어머니는 다르다. 어머니는 빛 같다. 맬릭이 어머니를 찍는 방식이 그렇다. 항상 빛 안에 있다. 항상 하늘 쪽을 보고 있다. 어머니가 실제로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잭의 기억 안에서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둘 다인 것 같다. 기억은 그렇게 작동하는 것 같으니까. 좋았던 것은 더 좋게 기억되고 무서웠던 것은 더 무섭게 기억되고.
영화 중간에 공룡이 나온다. 지구 생성 과정이 나온다. 바다가 나오고 용암이 나오고 세포가 나오고 공룡이 나오는데 처음 봤을 때 이게 왜 나오나 싶었고 나중에 생각해봤는데 모르겠다. 맬릭이 왜 넣었는지. 잭의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왜 지구 탄생을 보여주는지. 모르겠는데 이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있어서 잭의 가족이 더 작아 보였는데 작아 보이는 게 나쁜 게 아니었다. 우주 안에 있는 것들은 다 작다. 작은데 거기 있다. 거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같은 길을 걷는 일’을 쓰면서 패터슨이 매일 같은 것을 반복한다고 했는데 잭의 아버지도 반복하고 매일 아침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고 아들한테 뭔가를 요구하고 실망하고 또 요구하는데 그 반복이 패터슨이랑 다르다. 패터슨의 반복은 그 안에 시가 생기는데 잭 아버지의 반복은 그 안에 상처가 생긴다. 같은 반복인데 다르다. 왜 다른지는 모르겠다. 하려는 것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는 것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다르다.
잭이 어른이 된다. 도시에 산다. 높은 빌딩 안에 있다. 유리 너머로 도시가 보이는데 그 장면에서 잭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게 보이고 어릴 때 일인 것 같고 아버지인 것 같고 죽은 동생인 것 같은데 맬릭은 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냥 얼굴을 찍는다. 그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높은 빌딩 안에서 유리 너머를 보는 얼굴. 보고 있는데 안 보이는 것 같은 얼굴.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있었던 것 같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 넓은 모래사장이 나오고 거기에 여러 사람이 있는데 잭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어릴 때 잭도 있고 죽은 동생도 있고 다 거기 있다. 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죽은 사람도 거기 있으니까. 근데 이상하지 않다. 보다 보면 그게 맞는 것 같다. 기억 안에서는 다 같은 시간에 있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다 거기 있다. 다 거기 있었다.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것’에서 토카르축의 책이 덮어도 끝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끄고 나서도 그 모래사장이 남는다. 거기 있던 사람들이 남는다. 남는다.
뒷마당 잔디 냄새가 지금도 가끔 난다. 안 나는데 나는 것 같은 냄새. 아버지가 잔디를 깎던 소리도 가끔 들리는 것 같다. 안 들리는데 들리는 것 같은 소리. 없어진 것들이 그렇게 남는다. 냄새로 남고 소리로 남고 가끔 이유 없이 생각나는 것으로 남는다.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보고 나서 한동안 그게 생각났다. 잔디 냄새. 아버지. 여름. 다 지나간 것들인데 지나갔는데 남아 있는 것들. 왜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