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는데 줄거리를 말하기가 어렵다. 줄거리가 없는 건 아닌데 말하려고 하면 흩어진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어떤 사람은 몸에 대해 연구한다. 어떤 사람은 그냥 움직인다. 이것들이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 책을 다 읽어도 잘 모르겠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토카르축은 그 판단을 독자한테 넘긴다. 아니면 판단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방랑자들’이라는 제목은 폴란드어 원제 ‘Bieguni’에서 왔다. 비에구니는 슬라브 종파의 이름인데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있어서 한 곳에 머물면 악에 잡힌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계속 움직였다. 멈추지 않았다. 그게 구원이었다. 읽으면서 그 종파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움직임이 구원이라는 것. 멈추는 게 위험한 것.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패터슨이 매일 같은 버스 노선을 반복하면서 그게 어딘가로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가는 것처럼. 목적지가 없어도 움직임은 있다.
토카르축의 문장은 짧은 챕터들로 나뉘어 있다. 어떤 챕터는 한 페이지도 안 된다. 어떤 챕터는 꽤 길다. 그게 불규칙하다. 처음에는 그 불규칙함이 좀 불편했다. 뭔가 이어지려는 참에 끊기니까. 나중에는 그게 이 책의 방식이라는 걸 알았다. 이어지지 않는 게 이어지는 거다. 끊기는 것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 토카르축이 그렇게 썼다. 왜 그렇게 썼는지는 책 안에 있다. 움직이는 것들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점들이 있고 그 점들이 흩어져 있다. 그게 방랑자들의 세계다.
책 중간에 해부학자 이야기가 나온다. 17세기 사람이다. 죽은 사람의 몸을 연구한다. 표본을 만든다. 보존한다. 그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데 처음에는 왜 나오는지 몰랐다. 읽다 보니까 알 것 같았다. 몸을 보존한다는 것도 일종의 방랑이다.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것. 살아있던 것을 계속 살아있게 하려는 것.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같이 움직이려는 것. 그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토카르축은 설명하지 않으니까. 멘델스존이 말을 뺀 음악을 만든 것처럼 토카르축도 설명을 뺀다. 독자가 거기서 뭔가를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해도 된다. 그냥 읽어도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어디가 아니라. 무슨 시간에 있는지. 뭘 향해 가고 있는지. 그런 질문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책이 끝나도 그 질문들은 남아 있었다. 답은 없었다. 토카르축은 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만 흘려보낸다. 그 질문들이 독자한테 가서 그 독자의 질문이 된다. 그게 이 책이 하는 일인 것 같다. 내 질문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되는 것. 책에서 온 건지 원래 내 것이었는지.
다 읽고 나서 다시 첫 챕터를 폈다.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한다. 움직임은 항상 더 많은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넘어갔던 문장이다. 다시 읽으니까 다르게 읽혔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첫 문장이 다르게 읽히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첫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것처럼. 끝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러면 이 책은 끝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읽는 사람이 덮으면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책 안에서는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런 책들이 있다. 덮어도 끝나지 않는 책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