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
좁은 복도가 있다. 두 사람이 지나칠 때마다 스친다. 왕가위는 그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늘인다. 치파오가 흔들리고 시선이 잠깐 머문다. 처음 봤을 때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그게 슬프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봤을 때는 아름다운 것과 슬픈 것이 여기서는 같은 말이라는 걸 알았다.
‘화양연화’는 일어난 일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영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안다. 그 사실이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든다. 가까워지면서 자신들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두려워하면서 가까워진다. 왕가위는 그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치파오가 바뀌고 음악이 흐르고 슬로모션이 반복된다. 관객은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스스로 계산해야 한다. 정확한 답은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기 청의 치파오는 스물몇 벌이다. 장면마다 다르다. 꽃무늬에서 체크무늬로 단색으로. 옷이 바뀌는 동안 배경은 거의 그대로다. 같은 계단 같은 복도 같은 국수집. 시간이 흐르는데 공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질감이 거기 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같은 화면 안에 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다. 세계는 그대로인데 사람만 달라진다. 그게 이 영화가 말하는 고독의 방식인 것 같다.

왕가위의 카메라는 자주 문틈이나 창살 너머에서 인물을 찍는다. 직접 보지 않는다. 뭔가를 사이에 두고 본다. 처음에는 그 거리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중에는 그게 이 영화의 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의 감정을 직접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것. 너무 가까이 가면 다치게 된다는 것. 카메라가 물러서 있는 만큼 관객도 물러서 있게 된다. 그 거리에서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까이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쓰면서 토카르축이 설명을 뺀다고 했는데 왕가위도 그렇다. 설명 대신 거리를 둔다. 그 거리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게 만든다.
차우가 마지막에 앙코르와트에 간다. 돌벽의 구멍에 뭔가를 속삭이고 풀로 막는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딘가에 두는 것. 그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인 것 같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사라지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남는가. 왕가위는 답하지 않는다. 돌벽만 보여준다. 풀이 자라는 것만 보여준다. 복숭아, 또는 여름이 끝나는 방식에서 엘리오가 이미 끝난 여름 쪽을 오래 바라봤던 것처럼 차우도 끝난 것의 방향을 향해 선다.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을 어딘가에 묻는다. 그것으로 끝난다. 충분한지는 모른다. 영화는 그것으로 끝난다.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영화에서 그 시절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지나간다.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완성된 것은 끝나지만 완성되지 않은 것은 계속 그 자리에 있다. 돌벽 안에. 슬로모션 안에. 반복되는 음악 안에. 왕가위는 그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한 번 더. 한 번 더. 끝날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