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Paterson)’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같은 길을 걷는다. 같은 버스를 몬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바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마신다. 패터슨의 하루는 늘 그렇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그 하루를 일주일 동안 보여준다.
처음에는 지루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보면 지루하지 않다. 왜 지루하지 않은지 생각해봤는데 잘 모르겠다. 아마 패터슨이 자기 하루를 지루해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버스를 몰면서 시를 쓴다. 머릿속으로. 나중에 작은 공책에 받아 적는다. 성냥갑을 보다가 시가 된다. 아내가 자는 걸 보다가 시가 된다. 그에게는 같은 길이 매번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나는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서 시가 떠오른 적이 없다. 주로 어제 한 말을 후회하거나 오늘 해야 할 일을 세거나 그런다. 패터슨이 버스 핸들을 잡고 뭔가를 중얼거리는 장면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러나 싶었다. 부러웠는지 신기했는지 잘 모르겠다. 둘 다였던 것 같다.

《아무르》의 조르주가 매일 안느의 손을 닦아주는 것처럼 패터슨도 매일 반복한다. 그런데 느낌이 다르다. 조르주의 반복은 무게가 있다. 패터슨의 반복은 가볍다. 가볍다는 게 얕다는 게 아니다. 짐을 지지 않고 걷는 것처럼 가볍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여줄 뿐이다.
아내 로라는 매일 뭔가 새로운 걸 한다. 커튼에 흑백 무늬를 그리고 컵케이크를 굽고 기타를 배운다. 패터슨은 그걸 다 좋다고 한다. 의례적으로 좋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좋아 보인다. 두 사람이 저녁을 먹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오는데 볼 때마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살 수 있나. 저게 가능한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영화니까 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
영화 중간에 패터슨의 공책이 망가지는 일이 생긴다. 시들이 다 사라진다. 그 장면에서 나는 꽤 오래 멈췄다. 패터슨은 크게 무너지지 않는다. 슬프긴 한데 그게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다음 날 또 일어나서 또 버스를 몬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가 플랫폼에 혼자 남겨진 뒤에도 다음 날이 오는 것처럼. 다음 날이 온다는 게 위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온다.
마지막에 일본인 시인이 패터슨한테 빈 공책을 준다. 다시 시작하라는 것처럼. 패터슨은 그 공책을 들고 폭포 앞에 앉는다. 오래 앉아 있다.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카메라가 거기서 멈춘다. 나도 거기서 멈췄다. 한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았다. 빈 공책을 들고 폭포 앞에 앉아 있는 사람.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 저런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