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또는 여름이 끝나는 방식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복숭아가 먹고 싶었다. 마트에서 복숭아를 집어 들었는데 딱딱했다. 아직 덜 익은 것이었다. 그래도 샀다. 집에 가져와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며칠을 두었다. 물러지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다 결국 그냥 먹었다. 별로였다. 영화 속 복숭아는 달랐다. 엘리오가 복숭아를 들고 있을 때 카메라가 잠깐 머물렀다. 과육이 보일 것 같았다. 흘러내릴 것 같았다. 나는 그 장면에서 침이 고였는데, 욕망 때문인지 배고픔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구분이 안 돼도 괜찮은 것들이 있다.

올리버가 “later”라고 말하는 장면을 몇 번 다시 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왜 그렇게 봤는지는 모르겠다. 그 말이 건방진지 매력적인지 판단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판단이 안 됐다. 아마 그게 맞는 것 같다. 엘리오도 판단이 안 됐을 테니까. 판단이 안 되는 사람 쪽으로 자꾸 걸어가게 되는 것, 그것도 사랑의 한 형태라면. 영화는 올리버를 끝까지 완전히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내내 엘리오의 시선으로만 그를 본다. 그래서 올리버는 약간 불투명한 채로 남아 있다. 그 불투명함이 엘리오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생각난다. 주로 여름에, 별 이유 없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이탈리아 북부의 여름은 어떤 느낌일까 찾아봤더니 6월 평균 기온이 25도 정도라고 했다. 습하지 않다고. 그럼 좀 다를 것 같다, 한국 여름이랑. 여기 여름은 너무 덥고 끈적하고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그런다. 살구나무 그늘에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름이 아니다. 엘리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 에어컨 켜진 방 안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겠지. 그래도 뭔가는 비슷했을 것이다. 판단이 안 되는 사람 생각을 하면서 천장을 보고 있거나, 아무것도 아닌 노래를 반복해서 듣거나. 수피안 스티븐스의 기타 소리가 화면 밖으로 번져 나올 때, 나는 그 소리가 여름 냄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여름의 냄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맡아본 적 없는 냄새인데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들이 있다.

나를 이름으로 불러줘, 나도 너를 이름으로 부를게.”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생각했다. 이름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이름을 나누는 거구나. 네가 나이고 내가 너라는 게 아니라, 내가 너의 이름을 가지고 다니겠다는 것. 그러면 네가 어디에 있든 나한테 있는 거라는 것.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게 얼마나 위험한 방식인지도 생각했다. 나중에 돌려줘야 하는 이름이니까. 기차역 장면이 그래서 그렇게 길게 느껴졌던 것 같다. 올리버가 떠나고, 플랫폼에 혼자 남은 엘리오. 기차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언가를 더 기다리는 것처럼. 이름을 돌려받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미 떠나버린 사람한테서 무언가를 돌려받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어떤 경우에는 아주 오래 걸린다. 어떤 경우에는 끝내 못 받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펄먼 교수가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느꼈다는 사실을 지우려 한다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덜 어리석어 보이기 위해. 그러지 말라고. 그 장면을 보면서 아버지 생각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할 것 같지도 않다. 대신 밥은 먹었냐고 묻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다른 방식의 같은 말인지도 모르니까. 티모시 샬라메의 얼굴이 벽난로 앞에서 천천히 무너지는 걸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같이 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아무 말이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둘 다 가만히 있었다. 나중에 그 사람이 말했다. 이 영화 왜 이렇게 슬프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도 모르겠다. 슬픈 일이 딱히 일어나지 않는 영화인데. 한동안 아무 생각이 안 드는데 뭔가 가득 차 있는 느낌. 그런 느낌을 주는 영화가 자주 있지는 않다.

복숭아는 결국 남은 게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먹었고 하나는 너무 물러져서 버렸다. 여름 내내 사먹었는데 맛있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내년에도 살 것 같다. 매번 별로인데 또 손이 가는 것들이 있다. 그게 복숭아일 때도 있고, 어떤 여름일 때도 있고, 다 끝난 줄 알았던 사람 생각일 때도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검색창에 크레마라고 쳤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사진을 봤는데 조용하고 예뻤다. 언젠가 가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가 그냥 껐다. 꼭 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냥 잠깐 그쪽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이미 끝난 여름 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