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끝은 왜 그토록 고요한가? ‘아이리시맨’이 해부한 시간과 후회에 대한 장례식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Martin Scorsese)

출연 로버트 드 니로(프랭크 시런) / 알 파치노(지미 호파) / 조 페시(러셀 부팔리노) 외

장르 범죄 / 드라마 / 스릴러 / 전기

러닝타임 209분 (3시간 29분)

원작 찰스 브랜트의 실화 소설 ‘I Heard You Paint Houses’

개봉연도 2019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10개 부문 노미네이트

IMDb 7.8 / 로튼 토마토 95% / 레터박스 4.2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아이리시맨 속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프랭크 시런의 모습. 세월의 흐름에 따른 인물의 변화와 고독한 분위기를 담은 영화 스틸컷 이미지.


집을 칠한다는 것의 비극적 함의


페인트공 프랭크 시런의 기묘한 입문


영화 <아이리시맨>의 서막을 여는 가장 상징적인 문장은 “I heard you paint houses(당신이 집에 페인트칠을 한다고 들었소)”이다. 이 문장은 마피아의 은어로, ‘사람을 죽여 벽에 피를 뿌린다’는 뜻을 내포한다. 평범한 트럭 운전사였던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이 이 세계에 발을 들이는 과정은 지독하게 담담하다. 그는 특별한 야망이나 악의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단지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시키는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성실한 노동자’였을 뿐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프랭크의 삶을 통해 악(惡)의 평범성을 조명한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포로들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하고 총살했던 기억을 덤덤하게 회상한다. 그에게 살인은 ‘명령에 따른 업무’의 연장선이었다. 이러한 프랭크의 성정은 마피아 보스 러셀 부팔리노(조 페시)의 눈에 들기에 충분했다. 러셀은 프랭크에게 권력을 약속하는 대신, 절대적인 충성과 감정의 거세를 요구한다.

여기서 영화는 아주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타인에게 양도한 인간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프랭크는 러셀의 명령에 따라 집을 칠하고(살인하고), 그 피를 닦아낸다. 그는 시스템의 부품으로서 완벽하게 기능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은 서서히 마모되어 간다. 스코세이지는 프랭크가 마피아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을 화려한 액션이 아닌, 정교한 대화와 침묵의 미장센으로 그려낸다. 이는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에서 보여주었던 속도감 있는 연출과는 대조적이다. 카메라는 이제 폭력의 흥분이 아니라,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서늘한 정적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두 태양 사이의 행로


러셀의 질서와 호파의 광기 사이에서


프랭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러셀 부팔리노와 지미 호파(알 파치노)다. 러셀이 차갑고 견고한 ‘질서’라면, 지미 호파는 뜨겁고 예측 불가능한 ‘광기’와 ‘열정’이다. 프랭크는 이 두 태양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궤도를 유지하며 성장한다.

지미 호파는 당시 미국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전미트럭운송조합(IBT)의 위원장이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호파는 에너지가 넘치고, 타협을 모르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프랭크는 호파의 경호원이자 친구로서 그의 곁을 지키며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눈다. 호파는 프랭크에게 “너는 내 형제다”라고 말하며 마음을 열고, 프랭크 역시 러셀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정서적 유대감을 호파에게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호파의 타협 없는 성격은 마피아의 이권과 충돌하기 시작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러셀은 호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이 지점에서 프랭크가 겪는 내적 갈등은 영화의 정서적 핵심이다. 그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러셀의 명령과,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 호파의 생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스코세이지는 이 갈등을 요란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프랭크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빛과 호파의 무신경한 자신감을 교차시키며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결국 프랭크는 시스템(러셀)의 명령을 따른다. 자신이 직접 호파를 유인해 살해하는 그 순간, 영화의 공기는 얼어붙는다. 우정을 배신한 대가는 즉각적인 처벌이 아니다. 그것은 남은 평생을 따라다닐 지독한 ‘침묵’과 ‘공허’다. 프랭크는 자신의 손으로 친구를 죽임으로써 물리적인 생존은 거머쥐었으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디-에이징 기술이 담아낸 시간의 잔혹함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의 몰락


<아이리시맨>에서 화제가 된 디-에이징(De-aging) 기술은 단순한 기술적 과시가 아니다. 그것은 영화의 주제인 ‘시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 20대의 프랭크부터 80대의 프랭크까지,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기묘한 괴리감과 동시에 세월의 무상함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로버트 드 니로의 얼굴에 입혀진 젊음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찬란한 시절은 늘 가공된 기억처럼 흐릿하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프랭크가 적을 무자비하게 폭행할 때, 그의 육체는 활력이 넘치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다가올 미래의 고독을 예견하는 듯하다.

영화 후반부, 기술의 도움 없이 노년의 모습 그대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얼굴은 그 자체로 거대한 서사다. 주름진 피부, 탁해진 눈동자, 굽어버린 허리는 세월이라는 절대자가 휘두른 칼날의 흔적이다. 스코세이지는 의도적으로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이 ‘노년의 시간’에 할당한다. 젊은 시절의 화려한 범죄 행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지만, 요양원에서의 무료한 일상은 지독하리만큼 길게 묘사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질문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권력과 영광의 끝은 고작 이 좁은 요양원 침대인가?” 화려했던 시절을 함께했던 동료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프랭크는 홀로 남아 자신의 장례용 관을 미리 고른다. 시간은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심판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린다.


딸 페기 시런의 시선


말하지 않는 고발자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 중 하나는 프랭크의 딸 페기(안나 파킨)다. 그녀는 대사가 거의 없지만, 그녀의 눈빛은 영화 전체의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저지르는 폭력의 냄새를 맡아온 페기는 프랭크를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반면, 따뜻하고 인간적인 지미 호파에게는 마음을 연다.

지미 호파가 실종된 후, 페기는 본능적으로 아버지가 범인임을 직감한다. 그녀가 성인이 되어 프랭크와 절연하는 과정은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 중 하나다. 프랭크는 가족을 위해 그 모든 일을 했다고 변명하지만, 정작 가족들은 그가 바친 ‘피 묻은 돈’이 아니라 그의 ‘진심 어린 사과’와 ‘정직함’을 원했다.

페기의 침묵은 프랭크에게 내려진 사회적 사형 선고다. 그는 세상의 법망은 피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핏줄인 딸에게서는 영원히 유죄 판결을 받는다. 노년의 프랭크가 딸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려 하지만, 페기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 관계의 단절은 프랭크가 쌓아 올린 공든 탑이 결국 모래성 위에 지어진 것이었음을 폭로한다. 스코세이지는 페기의 시선을 통해 마피아 영화가 흔히 빠지기 쉬운 ‘폭력의 미화’를 완전히 거부한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작별 인사


장르의 해체와 거장의 성찰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코세이지가 평생 동안 천착해온 범죄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별 인사이자,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다. 그는 <좋은 친구들>에서 폭력의 흥분을, <카지노>에서 자본의 탐욕을 그렸다면, <아이리시맨>에서는 그 모든 것의 끝에 남은 ‘허무’를 그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요양원의 프랭크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지만 진정한 참회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그는 신부에게 방 문을 조금 열어두라고 부탁한다. 지미 호파가 살아생전 늘 그랬던 것처럼. 어둠 속에서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응시하는 프랭크의 모습은, 죽음을 앞둔 인간이 붙잡고 있는 마지막 미련과 공포를 상징한다.

스코세이지는 이 영화를 통해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에서 자신의 예술적 자유를 마음껏 펼쳤다. 3시간 30분이라는 파격적인 러닝타임은 상업적 타협을 거부한 거장의 고집이며, 관객에게 ‘함께 나이 들어감’을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적 장치다. 그는 카메라를 통해 20세기 미국의 어두운 뒷골목을 훑으며, 그 길 끝에 서 있는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라는 집을 어떤 색으로 칠하고 있는가?”


시간이라는 무덤 위에 세워진 비석


<아이리시맨>은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경험해야 하는’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느껴지는 그 지독한 공허함과 묵직한 여운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모든 권력은 부패하고, 모든 우정은 변하며, 시간은 결국 모든 것을 앗아간다는 것—을 마주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통증이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라는 세 거장의 연기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전설의 합주다. 그들이 연기하는 노년의 고독은 연기를 넘어 실제 그들의 삶과 겹쳐 보이며 숭고함마저 자아낸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이 작품을 통해 마피아 영화라는 장르의 문을 닫고, 그 위에 ‘시간’과 ‘후회’라는 이름의 비석을 세웠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방문을 조금 열어두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프랭크 시런의 고독이 당신의 마음속에도 작은 균열을 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이리시맨>은 넷플릭스가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길고, 가장 느리며, 가장 아름다운 장례식이다.


닫히지 않는 문 사이로 보이는 것들


마틴 스코세이지는 <아이리시맨>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가혹한 진실을 일깨워준다. 인생은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지만,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하나씩 앗아감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프랭크 시런이 요양원의 차가운 침대 위에서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자기 자신의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넷플릭스의 거대한 서사시 <아이리시맨>을 켜고, 3시간 30분의 시간 여행을 떠나보라. 그 여행의 끝에서 당신은 어떤 색의 페인트를 손에 쥐고 있을지, 그리고 당신의 문은 얼마나 열려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