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세계 3대 문학상인 인터내셔널 부커상
한강 작가에게 한국인 최초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긴 결정적 텍스트
구원은 때로 파멸의 형상을 하고 찾아온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며 스스로 식물이 되기를 선택한 여자, 영혜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영혜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지 않는다. 폭력적인 남편, 욕망에 눈먼 형부, 그리고 연민과 의무 사이에서 무너지는 언니의 시선을 빌려 영혜라는 존재를 난도질한다. 그녀의 채식은 단순한 식이요법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근원적인 야만성과 결별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우리는 그녀를 미쳤다고 말하지만, 사실 미친 것은 폭력을 정상으로 규정하는 이 세상이 아닐까 싶다.
비릿한 고기 냄새와 브래지어 없는 자유
영혜가 육식을 끊게 된 계기는 꿈이다. 그 꿈속에는 핏물 낭자한 고기와 짐승의 눈빛이 가득하다. 인간의 생존이 타자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그 자명한 진실이 영혜를 질식시킨다. 그녀가 브래지어를 답답해하며 벗어 던지는 행위는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과 에티켓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거부하는 상징적 선언이다. 남편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안온한 일상을 방해하는 ‘이물질’로 취급한다. 가족들이 그녀의 입에 억지로 고기를 밀어 넣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잔혹한 폭력의 정점이다.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 행해지는 강요가 한 인간을 어떻게 분쇄하는지 작가는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묘사한다.
영혜의 몸에 꽃을 그리는 형부의 욕망 또한 예술이라는 가면을 쓴 또 다른 포식 행위다. 그는 영혜의 몽고반점에서 태고의 순수함을 읽어내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침범에 불과하다. 영혜는 그 침범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녀에게는 이미 인간의 언어나 도덕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인간의 세계를 떠나 식물의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나무가 되는 꿈, 죽음보다 깊은 초록의 안식
결말에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영혜는 음식 자체를 거부하며 스스로 나무가 되기를 꿈꾼다. 물구나무를 서서 발가락에서 뿌리가 돋아나기를 기다리고, 햇빛과 물만으로 생존하려 한다. 이것은 거식증이라는 병명이 담아낼 수 없는 실존적 투쟁이다. 그녀는 짐승의 길을 버리고 식물의 길을 택함으로써 인간의 원죄에서 벗어나려 한다. 언니 인혜가 절규하며 그녀를 현실로 끌어내려 하지만, 영혜의 시선은 이미 저 멀리 숲의 끝자락에 닿아 있다.
인혜는 동생을 보며 비로소 자신의 삶 또한 거대한 인내와 억압 위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영혜가 먼저 미쳐버림으로써 인혜는 겨우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인혜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거대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나무들이다. 그 초록의 불꽃은 생명력인 동시에, 인간의 문명을 태워버리는 파괴적인 아름다움이다. 영혜는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형태의 존재로 변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자’는 독자에게 편안한 감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책장을 덮고 나면 입안 가득 비릿한 쇠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여 감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육식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누군가의 폭력 앞에 발가벗겨진 채식주의자였다. 한강은 영혜라는 극단적인 거울을 통해 우리 안에 숨겨진 가학성과 피학성을 동시에 비춘다. 그녀가 마침내 나무가 되었을 때, 남겨진 우리는 여전히 피 냄새 진동하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 형벌 같은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한 뒤늦은 연민뿐일지 모르겠다.